야곱과 팥죽 (Jacob and the Red St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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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3-14 15:24 조회1,709회 댓글0건본문
야곱과 팥죽 창25:19-34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근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하고,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자신 인생의 모든 답이 들어 있고, 거기서 모든 힘이 나오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답과 이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의 증인이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받은 인간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잡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셨는데, 그 만남의 길이 예배와 기도, 그리고 말씀과 찬양과 헌금 등입니다. 오늘도 그냥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언약을 잡고 깊이 들어가는 예배가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모든 처소에 임하고, 사탄의 모든 나라가 무너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언약을 잡고 예배를 드리면 자연적으로 영적 전쟁이 되고, 흑암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응답 받고, 치유 받는 예배되기를 바랍니다.
1. 야곱과 팥죽
1) 오늘 본문은 장자권을 사이에 두고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자권은 하나님의 언약의 족보 안에 들어가는 아주 중요하고, 근본 되는 축복이며, 장자권을 가진 자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축복하시고, 구원하시는, 인간이 받을 모든 축복이 다 들어 있는 언약입니다.
2) 이 언약은 창세 전의 약속과 은혜로 되어지는 것으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에서와 야곱도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고, 야곱이 늦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주어졌습니다. 장자권은 육신적 어떤 조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는 언약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하신 이 장자권을 두고 야곱과 에서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창27:41, 32:6). 그 원인은 전부 언약을 받은 야곱과 리브가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먼저 보면 야곱은 장자권이 이미 자기에게 와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는 있어도 확신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었으면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는 행위를 한다든지 형에게 맹세를 시킨다든지 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4) 이 모든 것은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확신 부족과 영적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장자권이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팥죽 같은 것으로 사고 팔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맹세를 한다고 하여 그것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에 대하여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5) 나중에 보면 야곱과 리브가가 합작으로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아버지 이삭에게 안수를 받게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인간의 안수 기도에 의하여 왔다 갔다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안수 기도가 필요 없었습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아무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6) 그런데 야곱은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파는 행위를 했고, 에서에게 맹세를 시키고 변장을 하여 아버지의 안수 기도를 몰래 받았습니다.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이 필요 없는 짓 때문에 에서와 원수가 되고, 괜히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고, 불필요한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7) 물론 하나님은 그 때에도 야곱을 따라 다니면서 축복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야곱의 행동이 정상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야곱이 고향에 그대로 있었어도 하나님은 더 좋은 방법으로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도록 역사하셨을 것 입니다.
8)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하였으면 좋았을까요? 간단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 하셨을 것입니다.
9) 그리고 야곱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이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장자권에 대한 메시지를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메시지를 정확하게 가족들에게 전달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에게는 어릴 때부터 계속 이 메시지를 들려 주어 에서가 이 장자권을 스스로 마음에서 평안하게 포기하게 했어야 했습니다.
10) 그리고 남편인 이삭에게도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삭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먼저 받은 자의 사명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11) 그런데 리브가는 이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자신도 확신이 부족하였거나 당시 타민족의 종교에 영향을 받아 종교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행동을 야곱과 함께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2) 그런데 야곱이 이 장자권이 자기에게 이미 와 있다는 것을 깡그리 모르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는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혹 무슨 문제가 있을까 두려워 숨기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야곱에게는 분명히 말은 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여 안타까운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아니면 이들의 종교성이 너무 깊어서 언약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언약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13) 우리는 우리에게 와 있는 언약에 대하여 분명하고, 선명한 고백과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약과 관련된 모든 부작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누림과 증거
1) 그러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확신을 가지고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언약을 누림으로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증거가 없어도 평생 확신을 누릴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응답을 통하여 증거를 볼 때 우리는 더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2) 언약은 믿으면 역사하고, 고백하고, 묵상하면 더 깊은 누림이 오고, 더 깊은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현상은 RT 7명을 비롯한 성경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다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다 나름대로의 영적 누림이 다 있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맞는 언약 누림을 위한 구별된 시간이 전부 다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정시기도, 아브라함의 단, 다윗의 찬양과 시, 바울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미했던 것들입니다. 창세기 24장 63절을 보면 이삭도 묵상의 시간을 갖었습니다.
3) 우리도 이런 영적 서밋을 위한 구분된 시간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영적 문제이고, 하나님도 영이요, 인간도 영이므로 모든 것은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야곱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과 리브가가 택해야 했던 영적 시스템이었습니다.
4) 언약을 고백하는 자는 누림이 일어나고, 지속하면 깊어집니다. 그리고 점점 더 깊은 확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스템을 지속하면 어느 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24시 기도의 축복을 주시고, 완전 정복하여 완전 증인되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다시 한 번 언약 되신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세계복음화, 237, 치유, 서밋을 언약으로 잡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